영화 ‘앨버트 놉스(Albert Nobbs)’는 2011년 개봉한 아일랜드·영국 합작 영화로, 19세기 말 아일랜드의 한 고급 호텔에서 일하는 집사 ‘앨버트’의 이야기를 통해 젠더 정체성과 사회적 생존의 모순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이다. 글렌 클로즈의 내면적인 연기와 로드리고 가르시아 감독의 절제된 연출은, 조용하지만 강한 울림을 준다. 이 영화는 단순히 ‘여성이 남성으로 가장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존재의 본질’을 숨겨야 했던 사람의 고통과 욕망, 희망과 좌절을 묘사한 심리극이자 사회 드라마다.
1. 19세기 말 아일랜드: 억압의 시대
‘앨버트 놉스’의 배경은 1890년대 아일랜드, 특히 빅토리아 시대의 영향 아래 엄격한 계급사회가 자리잡고 있던 시기다. 여성은 노동시장에 거의 진입하지 못했고, 진입하더라도 가정부, 유모, 요리사 등 극도로 제한된 역할만이 허용됐다. 사회의 중심은 남성이었고, 재산, 명예, 직업, 자유 등은 오직 남성만의 권리처럼 여겨졌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한 여성은 ‘남성으로 가장’하는 방법 외에는 독립적 삶을 꾸려갈 수 없었다. 앨버트 놉스는 그런 인물이다. 고아로 자란 그는 생계를 위해 남성으로 살아야 했고, 30년 가까이 ‘앨버트’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며 호텔의 집사로 일한다. 앨버트는 직원들 사이에서도 근면하고 조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고, 손님들에게도 신뢰받는다. 하지만 그의 삶은 두꺼운 침묵과 가면 속에 감추어진 고독의 연속이다.
성 정체성과 사회적 업압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하고, 관객들에게 다양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특히 앨버트와 휴버트가 여성의 복장을 하고 해변을 걷는 장면은 성별 표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한다는 평가가 있다.
2. 앨버트의 정체성 – 생존을 위한 선택
앨버트는 진짜 남성이 아니다. 그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성으로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 이 영화는 그 사실을 비밀처럼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처음부터 관객은 그의 정체를 알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가 왜 그렇게 살아왔고, 그것이 어떤 심리적, 현실적 부담을 가져오는지를 따라가는 데 있다.
앨버트의 행동은 언제나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그는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사적인 감정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여관방에서는 서랍 속에 숨겨둔 돈을 하루하루 세며, 작은 상점 하나를 여는 꿈을 품고 있다. 그에게 ‘남자로 사는 것’은 단지 정체성의 문제가 아닌, 목숨과 꿈을 지키기 위한 생존 방식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앨버트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거나 저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상황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며, 그 안에서 사람답게 살고 싶어 한다. 이 점에서 ‘앨버트 놉스’는 단순한 젠더 위장극이 아닌, ‘존엄성’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3. 젠더와 사랑 – 험한 꿈의 이중성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페인터 휴고와의 만남이다. 앨버트는 우연히 같은 방을 쓰게 된 그가 자신처럼 여성으로 살아가는 남성임을 알게 된다. 휴고는 훨씬 더 유연하고 활달하며, 파트너와 동거하며 목수로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앨버트는 처음으로 자신이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부터 앨버트는 자신의 꿈에 ‘가족’이라는 요소를 추가한다. 그는 호텔 하녀인 헬렌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녀와 함께 상점을 열어 안정적인 삶을 꾸릴 수 있으리라 상상한다. 그러나 이 사랑은 일방적이고 어긋난다. 헬렌은 앨버트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한 호기심과 현실적 계산으로 접근할 뿐이다.
이 사랑은 결국 앨버트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긴다.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과 꿈이 거부당했을 때 그는 처음으로 분노하고, 슬퍼하며, 혼란스러워한다. 이는 정체성에 기반한 사랑이 얼마나 복잡하고 위태로운 것인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 존재인지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4. 타인과의 거리 – 고립된 존재의 슬픔
‘앨버트 놉스’는 관계의 영화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명을 상대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영화 내내 그는 수화기, 편지, 돈, 동작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관계를 맺는다. 이는 그가 타인에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고립은 단지 비밀 때문만이 아니다. 사회 자체가 앨버트 같은 존재를 용납하지 않기 때문에, 그는 감정 표현조차 자제해야 한다. 이는 깊은 심리적 고통과 불안정함을 동반하며, 관객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그의 ‘침묵 속 울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영화는 앨버트의 소외를 피해의식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직시하며, 현실을 살아가는 주체로 묘사된다. 그는 고립되어 있지만,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성실하고 절제된 일상으로 삶의 의미를 만들어간다. 이는 그 자체로 강한 윤리적 태도이며, 비극 속에서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투쟁이다.
5. 계급과 빈곤 – 신분의 감옥
‘앨버트 놉스’는 젠더 문제뿐 아니라, 계급 문제를 심층적으로 다룬다. 앨버트가 일하는 호텔은 철저한 위계 구조로 운영된다. 주인과 손님은 절대적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하층 노동자는 어떤 판단력도, 자유도 없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해고되고, 병에 걸리면 버려진다.
앨버트는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철저히 지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성’이라는 가장 자체가 그를 이 계급 구조에서 한 단계 올려놓는다. 그는 ‘여성’이었다면 결코 집사가 될 수 없었겠지만, 남성으로 존재함으로써 제도적 안정성을 얻는다.
이 점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젠더, 계급, 신분이 삶을 결정짓는 시스템, 그리고 그 안에서 개인이 어떻게 꿈을 포기하고, 혹은 꿈꾸기를 계속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6. 글렌 클로즈 – 존재를 해석한 연기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은 글렌 클로즈의 연기다. 그녀는 ‘앨버트 놉스’라는 인물을 단순히 ‘남장을 한 여성’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목소리, 몸짓, 시선, 말투, 걷는 방식까지 철저히 ‘그 사람이 되어’ 연기한다. 특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의 근육 움직임 하나하나가 인물의 내면을 풍부하게 전달한다.
클로즈는 이 역할을 위해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쳤고, 실제로 1982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이 역할을 맡았던 경험도 있다. 영화에서 그녀는 그 기억과 기술, 감정을 모두 집약해, 한 인간이 되어간다. 이는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존재에 대한 철학적 해석이자 예술적 구현이다.
감독 로드리고 가르시아는 이러한 연기를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영화 전체를 절제하고 조용하게 연출한다. 과장 없는 촬영, 침착한 편집, 클래식한 미장센은 모두 앨버트라는 인물이 ‘조용히’ 존재하도록 돕는다.
7. 결론: 앨버트의 죽음과 유산
영화의 결말은 비극적이다. 앨버트는 상점을 열지 못하고, 헬렌과의 관계도 실패하며, 우발적인 사고로 생을 마감한다. 겉으로 보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그 결말을 단지 비극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그의 죽음 이후, 헬렌은 앨버트의 상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 한다. 그리고 리틀 조 같은 인물은 앨버트의 존재를 통해 처음으로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즉, 앨버트의 삶은 ‘희망의 씨앗’으로 남는다.
‘앨버트 놉스’는 조용한 영화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는 정체성, 자유, 인간다움에 대한 깊은 외침이 담겨 있다. 이 영화는 어떤 정의도 강요하지 않지만, 관객 스스로 생각하고 성찰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자체로 영화의 존재 의미는 충분하다.